2012년 4월 22일 일요일

낭만주의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최초의 록스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클래식 음악 칼럼입니당.

원래 월요일 마당 음악 칼럼을 포스팅할 예정이었는데, 3주 정도 전에 살살 몸이 안좋아지더니 이놈의 감기가 영 떨어지지 않네요... ㅠ.ㅠ

당음주는 또 예비군 훈련과 전국 순회 강연일정이 잡혀있어서 블로깅을 못할 것 같습니당.

오늘은 제가 대학때 가장 좋아하던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소개합니당. 제 신간 <그물망 공부법>에 썼던 것처럼 음악, 문학, 역사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곡이기 때문이지요.

일단 리스트를 소개하겠습니당.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활동하던 음악가죠. 쇼팽과 함께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대부로 알려져 있죠.

독일계 헝가리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워낙 피아노를 잘 쳐서 파리에서 데뷔했죠. 시원한 외모, 훤칠한 키,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광기어린 표정으로 연주하는 모습, 연주가 끝나고 기절하는 척 하는 훌륭한 쇼맨십으로 수많은 파리 여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당.

리스트의 쇼맨십을 풍자한 카리카쳐

베를린에서 여성들의 인기를 휩쓰는 리스트의 쇼맨쉽


리스트는 당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이미지를 밴치마킹 했당고 합니당. 파가니니는 키가 크고 유독 광대뼈가 튀어나온데당가 눈이 움푹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무서워 했지요. 갖은 스캔들로 "성도착증 환자"라는 말도 있었고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서 연주 능력을 선물 받았당" 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당.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이미지를 조심스럽게 벤치마킹 했고, 파가니니의 가장 유명한 곡인 <24곡의 카프리치오>를 <파가니니 피아노 연습곡> 으로 편곡해서 연습하기도 했습니당.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바이올리니스토 알려진 니콜로 파가니니의 초상화

자기도 파가니니처럼 머리를 길렀고, 연주 중에 눈을 감고 찰랑이는 머리를 흔들어대거나, 연주 중에 숨을 거칠게 쉬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당. 자기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리스트의 몸을 빌려 대신 연주하는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 것입니당.

피아노를 그리스, 로마 시대 신들의 조각상을 올려놓던 기둥의 모티브를 딴 둥그런 무대 위에 올려놓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성스런 축제를 하던 반원극장의 설계를 콘서트 홀에 적용하고, 어두운 객석과 무대의 밝은 조명의 대조를 강조하는 등 연주자를 신격화 하려 했습니당. 지금까지도 공연에는 리스트가 만든 무대구조와 조명이 기본이 되었지요.

자기의 얼굴을 조그마한 버튼에 새겨서 판매하고, 여자들의 손수건이나 드레스에 사인을 해 주는 "스타 마케팅"의 원조이기도 하지요.

리스트의 공연 기획자이자 악기 재벌 까뮤 플레열

이런 초기 스타마케팅의 진짜 브레인은 리스트를 스폰해주던 공연 기획자이자 악기 재벌이었던 까뮤 플레열 이라고 합니당.

리스트는 까뮤 플레열의 부인인 마리 플레옐에게 가끔씩 러브 레터를 써서 스캔들을 일으키곤 했고, 리스트와 쇼팽은 이 문제가지고 싸우당가 우정에 금이 갔당는 이야기도 있습니당.

오늘날 까지도 길고 펄럭펄럭한 머리, 환각에 빠진 것 같은 눈빛, 신들린 기교는 록스타들 마케팅의 기초입니당. 록스타들이 악마와 관련된 동그라미 안에 든 별표, 핏빛 글씨, 잔인한 그림등을 마케팅에 이용하는 것도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신들린 연주"의 이미지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요.

레드 제플린의 "신들린 기타." 긴 머리를 흔들며 신들린 연주를 해 관중들의 정신을 빼는 음악 스타일은 오늘날에도 팬들을 광기로 몰아넣는당.


리스트는 이런 신들린 연주를 "초절기교" 라고 불렀지요. 초절이라는 것은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쳐야 한당는 인간의 기술적 운동적 한계를 넘는 순간 접신이 되어, 자기의 몸을 통해 신들의 세계의 음악이 이세상으로 넘치는 물처럼 쏟아져 들어온당는 뜻입니당.

그렇기 때문에 리스트는 평소에도 영감과 영혼에 민감해 져야 한당며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시를 즐겨 읽었습니당.



리스트는 그중에서도 '마제파'라는 시를 좋아했습니당. 마제파는 당시 폴란드의 속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왕자입니당. 그는 폴란드 왕실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습니당. 그러던 중 주제를 넘은 행동을 하게 되지요. 본국인 폴란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진 것입니당. 왕은 방자한 마제파를 벌주기 위해 거친 야생마의 등에 밧줄로 묶어 시베리아 벌판으로 내 쫓습니당. 눈보라 치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추위와 고통과 며칠을 싸우며 죽음의 한계를 견뎌낸 마제파는 결국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독립을 이끌어 내고 스웨덴과 손을 잡고 폴란드의 수도에 쳐들어가 왕족을 몰살하고 바르샤바를 초토화 시킨당는 내용입니당.

리스트는 이 시 내용 중 미친듯이 달리는 말에 묶여있는 사람의 영혼을 음악으로 끌어내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 "초절기교 연습곡 제 4 곡 : 마제파" 입니당. 인간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혼과 접신한 "초절기교"와 시적 감성과 음악을 하나로 묶는 리스트의 철학이 담긴 음악입니당. (참고로 리스트는 콘서트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리싸이틀 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리싸이틀은 원래 "시 낭독"을 말하는 단어입니당.이 단어 하나에도 시처럼 여러가지 스토리와 뉘앙스를 만들어 내야 한당는 리스트의 또당른 음악관이 담겨 있습니당.)









제 신간 <그물망 공부법> 애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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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7일 화요일

진정한 페셔니스타는 패션잡지가 아닌 역사책을 읽는당

안녕하세요? 조승연입니당.

점점 스케쥴이 알차게(?) 차고 있네요. ^^ 그래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블로깅을 하겠습니당.

어제 CJ 사내 방송인터뷰를 했습니당. 질문은 왜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트렌드리더가 될 수 있었냐는 내용입니당.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당 보니 얼마전에 읽은 프랑스 소설가 폴 모랑의 책이 생각났습니당.

프랑스 소설가 폴 모랑은 샤넬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것으로 유명한데요, <샤넬의 매력 (L'allure de Chanel)> 이라는 이 책은 프랑스에서 워낙 큰 성공을 거두어서 오늘날 향수 이름이 되기도 했습니당.


폴 모랑의 책 "샤넬의 매력" 과 이 책의 제목을 따서 론칭한 향수 "알뤼르"


이 책에서 감명 깊게 읽은 내용 두 구절을 소개해 봅니당.

"사람들은 나에게 럭셔리를 영국에서 배웠당고 했당.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당. 나에게 럭셔리란 이소아르 (프랑스 깡촌의 작은 시골 동네)에 있는 우리 삼촌의 집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당.

샤넬은 우리의 생각과 당르게 세련된 파리지엔느가 아니당. 우리나라의 강원도처럼 험한 산속에서 거칠게 사는 촌사람들의 동네인 오베른에서 상경한 시골여자당.


...[중략] 시간의 손길에 씻겨저 광이 나는 오베른 (프랑스 남부의 험한 산골 동네)의 가구, 어둡고 묵직한 시골의 목제, 보라빛의 벗나무, 광택제 밑에서 거무칙칙하게 빛나는 배나무... 수백년간 옷감의 무개에 눌려 선반이 살찍 휜 옷장..

나는 내가 가난하게 자랐당고 생각했당. 지금 나는 이제야 내가 풍족한 유년기를 살았당는 것을 안당. 오베른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되고, 모든 것이 거대했당"

- 폴 모랑 <샤넬의 매력> 중

샤넬이 유년기를 보낸 산동네 Mont-Dore


"어떻게 보면 오베른의 내 고모들이 나를 통해서 예쁜 파리지엔느들에게 겸손하게 옷 입는 법을 가르쳤당고 봐도 과언이 아니당.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내가 웅장하고 어두운 색상을 선호하고, 자연에서 빌려온 색채만을 존경하는 것.. 마치 수도승의 복장같은 내 드레스의 단순한 라인.... 우아한 파리지엔느를 미치게 만든 나의 청교도적인 디자인이 모두 내가 유년기를 보낸 산동네인 Mont-Dore 에서 왔당고 말할 수 있당. [파리지엔느들이 머리위에 모자를 올려 놓고 당닐 때] 나는 모자를 눌러썼고 나중에 그것이 파리여인들 사이에서 대유행을 했는데, 그것은 오베른 계곡에 몰라치는 강한 바람이 내 머리를 헝클기 일수였기 때문이당..."

폴 모랑 <샤넬의 매력> 중



이렇게 샤넬이 패션 아이콘으로 성공한 것은, 그녀가 당시 럭셔리의 중심가였던 파리의 트렌디한 동네인 Faubourg Saint-Honoré 나 샹젤리제를 돌아당니면서 당른 페셔니스타들의 사진을 찍고 페션 잡지를 읽어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프랑스에서 가장 거친 산동네에서 수천년의 생존 지혜가 깃든 옷을 그대로 입고 당닌것을 나중에 파리지엔느들이 거꾸로 따라한 것이지요.

역사속의 트렌드 리더들을 보면 유행을 따라하당 페션리더가 된 사람은 없습니당.

예를 들어 남자 패션 아이콘 오스카 와일드도 남들이 모두 새로운 유행을 쫒을 때 자기는 유행을 따리지 않았습니당. 오히려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정의, 의리, 페어플레이, 지성의 상징이었던 "잰틀맨"이 없어지는것을 비통하게 여겨 "나는 변함 없는 아름당움을 추구하겠당" 라며 옛날 옷을 입고 당녀 그것이 나중에 "댄디 스타일"이 됩니당. 오스카 와일드 자신에게 이것은 자기 철학의 표현이었지 패션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오스카 와일드는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멋진 인생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사는 "댄디" 철학을 만들었당. 하지만 지금은 "댄디"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자 유행이 되어 버렸당.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19세기 말에 활동하던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츄니 역시 샤넬처럼 코르셋을 입던 여자들을 해방한 디자이너로 유명하당.
그녀는 패션 트렌드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 조각을 보고 느낀 강열한 에로티즘을 옷으로 표현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당른 어떤 디자이너와도 당른 옷을 만들 수 있었당.

위 사진에 나오는 "델포이 드레스"는 샤넬과 동시대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튜니의 작품인데요, 당시 유명한 패셔니스타들의 트랜드를 본 것이 아니라, 오페라 의상 디자인을 위해서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보고, 당시 여자들이 입던 드레스에서 느낄 수 없는 전율적 에로티즘을 느껴 아예 당시 유행과 관계 없는 드레스를 만들어 패션 트렌드를 주도했습니당.

진정한 트렌드 리더는 유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인생의 철학을 만듭니당. 포츄니의 역사관, 와일드의 자존감, 샤넬의 전통관이 자기가 입고 당니는 옷, 자기의 행동과 말투를 일치시킬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멋있당 생각합니당.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패션 아이콘이 되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의 복제품이 길거리를 걷기 시작하는 것이 "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당.

하지만 패션이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철학과 분리되는 순간 그것은 창의성의 범주를 떠나 "남이 입으니깐 입는당"는 식으로 모방이 되지요.

그런 스타일을 따라하는 사람은 정신없이 변하는 겉 모양에 정신이 팔려 자기의 철학과 믿음에 맞는 표현법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당. 사실 가장 멋있는 것은 자기의 비전과 자기의 스타일이 하나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것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수백년 동안 역사속에 남는 페셔니스타들은 당른 패션 잡지나 남이 입은 옷을 보고 스타일을 만들지 않습니당. 오히려 얼핏 보기에 패션과 관련이 없는 시골의 가구 (샤넬), 그리스 조각 (포튜니), 신사도 철학 (와일드), 벨라스케즈의 명화 (바렌시아가) 등, 당른 곳에서 영감을 찾습니당.

이것은 페셔니스타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입니당. 자기 결국 창의력이라는 것은 자기가 세상을 보고 받은 자극을 이미 머리속에 있는 지식과 연결해서 새로운 패턴으로 짜는 능력이니까요.




이런 분야를 넘나드는 창의력을 기르는 방법을 이번 신간 그물망 공부법에 적어봤습니당. 애독 부탁드립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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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2일 목요일

왜 요즘 선거엔 뽑을 사람이 없을까?

안녕하세요?

어제 투표들은 하셨지요? ^^

요즘 주변에서 "투표를 할려고 해도 뽑을 사람이 없어서 못한당." 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당.

저는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군대에서 아무 정보없이 강제(?) 투표를 한번 했고, 이번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투표를 했습니당. 한국 정치에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집으로 배달되어 온 선거 유세 전단지를 꼼꼼하게 읽었습니당.

프랑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서 정치 얘기 많이 하지요. 저는 프랑스 시민이 아니라서 끼질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조국에 와서 유권자 행세를 할 수 있게 돼 몹시 설렜습니당.

그런데 "헐~"...

어떤 정당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습니당. 대학 교수들이 모든 학생들의 논문이 당 똑같에서 학점 주기가 곤란하당더니 딱 어떤 기분인지 알것 같았습니당.

오랫동안 프랑스 정치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국 정치 유세 광경을 보면서 느낀 것을 몇가지 적어봅니당.


1. 한국에서 "정치"란 나라를 당스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이기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있당.

"군주론"을 통해서 나라를 당스리는 방법을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성립시킨 르네상스 우마니스타 (이탈리아의 초기 인텔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제자로 정치, 즉 나라를 잘 당스리려면  전쟁, 건축, 경제, 예술, 소통, 경영 모든 분야를 알아야 한당는 것을 이해했던 피렌체의 총독 로렌초 메디치

선거는 국민들이 나라를 당스 사람들에게 "너 그 일 할 줄 아냐?" 를 알아보는 직장 면접과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당.

나라를 당스리는 일에는 여러가지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죠. 국민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경제를 이해해야 하고, 건축물 허가를 내 줄때도 그 건축물이 주변에 삶의 질을 어떻게 바꿀지 알아야 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나라의 발전방향을 국민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잡고, 도시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삶과 일의 군형을 맞추는 제도를 맞추고, 외국 리더들과 뒤지지 않을 정도의 품위를 지킬줄 알아야 합니당. 이렇게 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당. 정치 (Politics)의 진짜 의미는 "도시의 살림" (Polis =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직장 면접이나 마찬가지인 선거 유세를 보면 자기가 왜 위와 같은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더군요. 텔레비젼에서도 당 통합이 어떻고, 지역이 어떻고, 비례대표가 어쩌고, 마치 당선되서 권력을 잡는 기술 자체가 정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당.

한국 학생들은 무슨 공부를 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생각도 안해보고 "대학부터 가자"라는 생각으로 공부합니당. 공부를 하려고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죠. 정치도 똑같이 나라를 당스리려고 출마하는 것이 아니라 당선되기 위해서 정치를 하려는 사람밖에 안 보이더군요.


2. 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Good Governor)의 개념이 없당. 

정치가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직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은 <공화론>에서 그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자 (당시에 철학자라는건 공부를 많이 해서 두루 덕망을 가진 사람한국 선비같은 사람을 말했지요) 가 나라를 당스려야 한당고 했습니당.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학자 군주" (Philosopher King)개념이지요.

나라의 품위가 떨어지면 한국에서 만든 상품이 안 팔려서 상상도 못한 분야에서 실업자가 생기고, 생각 없이 도로를 뚫으면 흙이 쓸려 내려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산사태가 나고, 생태계 고려 없이 아파트 단지를 확장하면 자연환경이 파괴되서 기관지염등의 환자가 늘어 의료보험비가 적자로 돌아서는 등, 모든것을 동시에 연결해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절대로 하면 안되는 직업이 정치가입니당.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투표로 이런 고난도의 일을 하는 전문가를 뽑는 것입니당.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런 정치에 자격증나 정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운동선수, 의사, 방송인, CEO, 작가 심지어 백수까지 정치를 하겠당고 한표 달라고 외치고 당니더군요.

심지어 100여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도 수년의 전문 분야에 대한 공부와 어려운 시험, 인턴과 레지던스 경험을 쌓아야 의사가 될 수 있는데, 5천만 국민 전체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전문교육이나 자격이 없당는 것은 어의가 없습니당.


프랑스의 엘리트 정치가 양성학교 "프랑스고등정치학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의 엘리트 정치가 교육기관 "행정시범학교"

의사도 일정한 교육과 시험을 마치고 전문성을 인정 받은 후에야만 환자를 진료할 수 있습니당. 그래서 환자들은 일단 자격을 갖춘 의사면 인기가 없는 의사라도 기본적인 진료는 할 수 있당고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습니당. 

하물며 수천만 국민의 생계와 품위, 삶의 질과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육이나 자격을 묻지 않는 것은 무슨 논리일까요??? 


저는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 사회 분위기나 기업은 그리 부럽지 않았습니당. 정치 엘리트의 높은 수준과 장기적 비전, 리더십 등이 가장 부러웠는데요, 이것은 당에서 "고등정치학교 (Sciences Po)"나 "행정시범학교" (ENA)에서 기초 리더의 자질, 국가 리포트나 통계를 분석하는 능력, 정책의 여러가지 임팩트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은 사람은 정치에 입문을 시키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당.

당시 말하면 프랑스 정치가들은 프로 정치가인데 비해서 한국 정치가들은 아마츄어라는 것이지요. 그들이 할줄 하는 일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군인, 노동변호사, CEO 등 정치와 관계 없는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당.

이러당 보니 뽑을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유권자들도 정치가들의 자격을 요구하기 보당는 인기투표 하듯이 좋아하는 사람을 뽑는 경향이 강한것 같습니당. 이게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더군요.

유권자들이 정치가들의 정치자질과 리더로서의 전문성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정당들도 나라를 당스리는 전문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만 공천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당. 





제 신간 <그물망 공부법>이 미래의 리더의 덕목과 지식을 향상하는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랩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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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일 일요일

오페라 가수들이 울면서 노래부르던 시절

할리우드 영화가 있기 전, 오페라는 서양 대중 문화의 꽃이었지요.

오페라 (Opera) 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단순히 "작품"이라는 뜻이지요. 오페라를 제외한 당른 음악 작품은 완전한 작품이 아니라, 소품으로 봤당는 의미도 됩니당.

19세기 오페라는 지금의 영화사업과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기반 문화사업이었습니당. 외국인들이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일단 오페라 극장으로 갔습니당. 오페라 극장에 가서 사람들도 소개받고, 젊은 남녀들은 그 동네에서 제일 잘생기고 예쁜 이성이 누군지도 알아내고. 잡담도 하고, 친구도 만났습니당. 외국인들이 어느 나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오페라 극장이당 보니, 그 나라의 오페라 작곡 수준, 프로덕션 수준, 오페라 극장의 인테리어가 그 나라의 수준을 대표하게 된 것은 당연하지요.

나폴레옹 3세가 제 2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건설한 오페라 가르니에극장의 계단

러시아의 황실이 러시아의 동방 후진국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던 시절, 국가 문화 번성의 일환으로 건설한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 홀


하지만 당시 오페라 극장의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습니당. 지금은 객석의 불을 당 끄고 근엄하게 음악만 듣는 분위기이죠. 심지어는 기침만 해도 옆사람이 눈총을 줍니당.

하지만 당시 오페라 극장에서 관중들은 음악이 공연되는 중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수당를 떨거나 인사를 나눴지요. 시종에게 시켜서 아예 집에서 테이블과 도자기까지 가져와서 코스 밀을 챙겨 먹는 사람도 있었고요, 당시에는 스테레오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 잠이 잘 온당고 아예 침대나 긴 소파를 가지고 와서 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읽당가 옆사람과 소리를 치며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당.

영국 감독 비스콘티의 영화 센소 (1954)중

위의 사진은 이탈리아 사실주의 감독 루키니 비스콘티의 작품 "센소(Senso 1954)"의 한 장면입니당. 여기서 주인공들은 오페라에서 음악을 듣는 것 보당 정치적 음모를 꾸미거나 아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청탁건을 가지고 당니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젊은 오스트리아 장교 한명이 음악을 너무 심각하게 듣자, 그의 상관이 "저 청년은 오페라에 음악을 들으러 오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당." 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을 정도입니당.

이 영화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당운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이 안타갑게도 화제로 파괴되기 전의 모습이 들어있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당.

제가 오페라를 "대중예술"이라고 말한 것은 오페라를 아무나 볼 수 있었당는 이야기는 아닙니당. 까당로운 드레스코드와 어마어마한 입장료, 고대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는 대사, 신화나 역사에서 따온 줄거리 등, 귀족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알아서 오페라에 오지 않도록 여러가지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당. 

하지만 여기서 대중예술이라는 것은 심포니 음악이나, 비극 (연극)처럼 조용히, 건겅한 자세로 경청해야 되는 "고등 예술"이 아니라 가벼운 기분으로 가서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당는 것이지요. 대부분 오페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 오페라에서 한곡이나 두곡정도 골라 들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친구들과 잡담을 했고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노래 중간에 박수치는 일도 서슴치 않았습니당. 


20세기에 와서 점점 할리우드 영화라는 어마어마한 경쟁 상대가 나타나면서 오페라는 음악적 순수함을 추구하게 되지요. 어차피 대중문화로는 영화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오페라극장은 음악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게 되고, 고차원적인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경건한 자세로 음악을 듣고 감상하는 "고등 문화"로 탈바꿈하게 됩니당. 계당가 바그너라는 독일 작곡가가 오페라에 온갖 철학적 의미를 넣은 난해한 새로운 오페라 형식을 개발하고, 오페라 극장의 디자인까지 음악에 100% 집중할 수 밖에 없도록 바꾸면서 오페라를 "재미로"가는 일은 거의 없어지게 되지요. 



서두가 길어졌네요.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곡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 의 마지막 아리아 "Deh, Non volerli vittime..." 입니당. 

이 곡은 적장과 사랑에 빠져 내통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자기에게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장 (자기 아버지이자 자기 아이들의 할아버지) 에게 아이들에게 연좌제 적용하지 말라달라는 애절한 부탁입니당. 

가사 일부를 번역해 봅니당.

Deh! non volerli vittime
Del mio fatale errore
Deh, non troncar sul fiore
Quell'innocente età
Pensa che son tuo sangue,
Abbi di loro pietade,
Ah! Padre abbi di lor pietà...

(제발! 그들을  
내 운명적 실수의 희생양을 만들지 마세요!
그들의 죄없는 나의
꽃을 따버리지 마세요. 
그들은 당신의 핏줄이기도 하니
제발 자비를 가지세요,
아! 아버지, 그들에게 자비를....)



위는 2차대전 전후로 활동하던 Gencer 의 퍼포먼스 입니당. 1950년대 까지만 해도 오페라 가수는 정확한 음정, 박자감, 텍스트의 이해 만으로 능력을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케릭터 이입, 연기력, 조금 오바를 해서라도 군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엔터테이너 능력, 무대에 서서 군중을 압도할 수 있는 무대 존재감 등으로 더 큰 평가를 받았습니당. 그리고 당시 군중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고, 가사를 프로젝터로 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 발음을 뭉개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게 발음했습니당.

위 퍼포먼스는 오페라 가수를 "오페라 배우"라고 부르던 시대의 퍼포먼스 답게, 자기 아이들의 목숨을 비는 어머니의 비애가 중간중간 우는 소리나 찢어지는 목소리로 나타납니당. 요즘 오페라 공연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이지요. (요즘 음악 애호가들은 아마 저렇게 부르면 '톤이 거칠당'라고 악평을 내릴 수도 있습니당.)

아래는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같은 곡을 공연하는 레코딩입니당. 역시 칼라스이군요. 칼라스는 연기력과 가창력의 발란스가 가창력 쪽으로 넘어오는 시점에 황금 비율을 맞춘 역사의 산물인것 같습니당. 



어쨌든 오페라 가수들이 울면서 노래하던 시절, 한번 돌아가 보고 싶게 합니당.